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미란다가 운전기사에게 “go”라는 대사 한 마디를 던집니다.
미란다가 평소에도 잘 하는 말이었습니다. “가” 내지는 “출발해”라고 번역해도 손색없겠죠. 하지만 당시 극장판 자막은 단순히 “가”가 아니었습니다. “김기사, 운전해”. 네, 바로 당시 개그우먼 김미려 씨의 유행어였습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있던 관객들은 이 마지막 대사를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을만한 대목입니다. 물론 지금은 시대가 지나 다르게 번역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흔치 않은 '초월 번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꼭 유행어를 넣는 것이 초월 번역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보다 최근 작품으로 초월 번역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작품이 바로 <데드풀(deadpool)>입니다. 황석희 번역가의 재치 넘치는 번역 덕분에 ‘번역 덕분에 더 재미있게 봤다’는 사람도 많았죠.
접니다.
데드풀’로 번역된 영화 포스터 문구 ‘A New Class of Super Hero’는 엄밀히 따져 본다면 오역이겠죠. 하지만 이걸 두고 오역이다, 잘못된 번역이라고 지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데드풀이라는 캐릭터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적절한 번역이기 때문이죠.
번역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런 부분에서는 “와, 저렇게 번역을 하다니!”라고 한 번쯤 생각했을 겁니다. 이렇게 원문의 의미를 최대한 현지의 정서와 표현을 활용해 번역하는 것, 원문의 단어 의미 하나하나를 다 살리지는 않더라도 이질감 없이 원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 이런 초월 번역의 예는 영화 자막뿐 아니라 다양한 콘텐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서브컬처를 포함한 각종 동영상 및 게임 콘텐츠에서 초월 번역은 이미 유저들의 또 다른 재미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 "pokémon">의 캐릭터 이름들도 대표적인 초월 번역의 예입니다.
잘 알려진 ‘파이리’나 ‘고라파덕’ 같은 캐릭터 이름 역시 원래 일본어 이름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파이리의 원래 이름은 ‘ヒトカゲ(히토카게)’로 ‘불(ヒ)’과 ‘도마뱀(トカゲ)’의 합성어입니다.
불을 가진 도마뱀인데, 꼬리에 불이 달린 점에 착안해 파이어와 꼬리를 합쳐 파이리가 된 것이죠. 이 역시 데드풀의 번역 사례와 마찬가지로 원제나 원문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지인들이 캐릭터의 특징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이름을 택했습니다.
게임에서 특히 초월 번역을 자주 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유저들이 직접 제작하는 다양한 비공식 한글 패치가 있습니다. 모든 번역은 같을 수 없다는 진리를 증명하듯 번역하는 사람마다 다른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게임회사들이 현지화에 많은 공을 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고 한눈에 이해할 수 있게 여러 차례에 걸쳐 번역과 검수를 진행합니다. 그 덕분에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나 아이템, 아이템에 대한 설명까지 원문의 간섭 없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죠. 또한 초월 번역이 많이 적용되는 상황 중에 하나가 바로 원어의 말장난이 섞인 부분입니다. 아마 많은 번역가들이 가장 많이 고민하는 부분이겠죠. ‘오버워치 2(Overwatch 2)’ 트레일러 영상에도 이런 말장난이 있습니다. “Ice to meet you”라는 대사입니다. 메이(Mei)라는 얼음 관련 스킬을 가진 캐릭터에게 인사를 건네는 장면에서 상대방이 “Nice to meet you”가 아니라 “Ice to meet you”라고 하는 거죠. 이 부분은 “매(Mei)~력적이십니다”로 번역되었습니다. 만나서 반갑다는 원문의 의미를 살리기 보다 말장난이 섞인 인사였음을 전달하는 거죠.
위에 나열된 예시 이외에도 우리의 일상생활 곳곳에서 초월 번역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누구나 번역가가 되어 초월 번역을 해볼 수도 있겠고요. 간혹 초월 번역과 의역의 경계가 조금 모호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디까지가 의역이고 어디부터가 초월 번역이냐는 의문이죠. 이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을 이야기하자면 아마도 번역문에 원문의 흔적이 얼마나 남아있는가 입니다.
초월 번역에는 사실 원문의 흔적이 거의 없고, 원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되게 됩니다. 하지만 의역이든 초월 번역이든 보는 사람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초월 번역을 한다고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번역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초월 번역을 너무 남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습니다. 원문의 의미를 해칠 뿐 아니라 재치와 위트를 넘어서 지나치게 많은 비속어와 유행어를 사용하는 것이죠. 제대로 된 번역이란 상황과 때에 맞게 적절한 용어와 뉘앙스로 나타나야 하는데, 이 점은 초월 번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넷플릭스의 광고 중에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로 잇다”라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국어 라임이 섞인 문장을 외국어로 번역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아마 아이디어가 쉽게 떠오르지는 않겠죠. 해당 언어의 라임과 원문의 메시지를 함께 고려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한 번쯤 내가 번역가라면 어떻게 번역을 할지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나만의 개성 있는 초월 번역이 나올 수도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