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당연히 번역은 번역사가 하는 것이지만, 의뢰부터 납품까지의 과정을 톺아보면* 여러 사람이 ‘번역’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번역 프로젝트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도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 톺아보다 : (사람이 무엇을) 샅샅이 훑어 가며 살피다.
만약 의뢰인에게 잘 아는 번역사가 있다면, 의뢰인과 번역사의 직거래가 성사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번역 회사에 의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번역 회사에서는 담당 PM의 관리 아래 번역사들이 실제 번역을 수행합니다. 의뢰인은 의뢰를 하고 결과물만 받으면 되는 것 같지만, 번역 과정에서 번역사가 하는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해주고, 추가 정보도 제공해야 하니 사실상 번역에 함께 참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번역사와 번역 PM은 매우 특수한 관계입니다. 일반적인 상사·부하 관계와도 다르고, 연예인과 매니저의 관계도 아니며, 그렇다고 기업과 기업의 관계도 아닙니다. 번역 PM은 번역 회사 소속이지만 때로는 회사를, 때로는 번역사를 대변합니다. ‘번역’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둘러싸고 형성된 번역사와 번역 PM의 관계는 무엇이라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들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둘 모두 바라는 바는 한 가지입니다. 주어진 번역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 의뢰인이 만족할 수 있는 번역 결과물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의기투합하기도 하고, 때로는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번역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번역사와 번역 PM이 얼마나 잘 협력 하느냐, 얼마나 서로 신뢰 하느냐에 따라 번역 결과물의 품질 수준이 달라집니다.
번역사에게 번역 PM은 실질적으로 번역 의뢰를 전달하는, 즉 업무 요청과 같은 기분 좋은 연락을 주는 사람입니다. 번역 과정에서 의문이 가는 부분이나 확인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답변도 의뢰인으로부터 받아 전달합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번역 PM으로부터 받는 연락은 대부분 반가운 소식일 겁니다. 반면 결과물에 대한 수정과 코멘트 등 번역사 입장에서 달갑지 만은 않은 연락도 있겠지만, 보다 나은 결과물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무엇보다도 번역사가 번역 PM을 믿고 신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의뢰인의 무리한 요구를 조정해 주는 대변인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만일 번역사가 전적으로 번역에만 열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의뢰인과 번역사 사이에서 번역 PM이 적절한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짜고짜 번역사에게 직접 얘기하겠다고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의뢰인을 말릴 수 있는 사람도, 번역사가 직접 말하기 난감할 수 있는 요율과 납기 같은 부분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번역 PM뿐입니다.
그렇다면 번역 PM에게 번역사란? 프로젝트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한 명의 PM이 여러 번역사들을 담당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러 번역 프로젝트를 담당합니다. 따라서 하나의 번역 프로젝트를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번역사와 소통해야 합니다. 납품 일정과 작업 진도를 체크하는 것만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도중에 바뀌는 의뢰인의 요청과 번역사의 각종 질문을 해결하느라 진땀을 빼는 경우도 많습니다.
의뢰인의 요청을 번역사에게 전달할 때나, 번역사의 질문을 의뢰인에게 전달할 때 (특히 최대한 신속한 답변을 요청할 때) 번역 PM은 매번 양쪽 대신 모두에게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끼며 회신을 기다리게 됩니다. 평소 가까운 번역사도 양해를 구해야 할 때는 왠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번역사를 전적으로 믿고 맡겨야 합니다.
이렇듯 번역사와 번역 PM 각자가 느끼는 어려움과 고민은 조금씩 다릅니다. 하지만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들이기에 공감대가 형성되기 마련입니다. 가장 가깝지만, 동시에 가장 어려운 관계임에도 번역사와 번역 PM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알면 알수록 복잡, 미묘한 번역사와 번역 PM의 관계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번역사와 번역 PM의 관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 합니다.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